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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CHAE-YEON  이채연                                                 2018. 3. 20 – 3. 31

 

 

동시대를 그리는 민화, 일상처럼 편안한 풍경

 

인류가 지구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 진화는 땅으로부터 손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자연치유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그것 또한 자유로워진 손의 힘으로 해결해 왔다. 그리고 인류는 손의 사용을 급속도로 발전시켰고, 손 사용을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결국, 손은 우리의 정신활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금처럼 이끌어 온 인류 고유의 신체다. 따라서 우리의 손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채연 작가는 집착하리만큼, 이 감동적인 손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다. 해서 선택한 그리는 방법으로, 민화를 택했고, 그리기와 생각하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시대에 민화는 정신 수양할 때, 추천을 할 만큼 시쳇말로 노동 집약적인 그림이다. 손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선택한 기법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집념과 고통이 수반되는 기법인 것은 작가 스스로도 충분히 깨닫고, 견뎌내고 있는 듯 하다. 민화는 전통적으로는, 누구나 편안하고 쉽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릴 수 있는 대중화이자 세속화였다. 물론, 전문적인 화원들도 그렸지만, 말 그대로 민화는 민중들의 다양한 희망과 바램 혹은 장식을 위해 그려지고, 소통되어 왔던 그림이다. 따라서 이채연은 무엇을 그리기 위해 이 그리기 힘들고, 지극히 대중적인 민화를 택했을까. 궁금하다.

 

우선, 그의 관심사는 이 시대의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다양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꾸리고 있는 가정인 듯 하다.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내는 것이 그 어떤 행복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 가정은 가장 소중한 그의 안식처고 도피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소하게 발견되는 일상의 물건이나 사건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상상과 창작의 소재로 바뀌고, 작가만의 풍경 혹은 정물로 다시 태어난다. 민화가 사람들의 바램과 소소한 일상을 그려왔었던 우리만의 전통이자 예술적 감수성이었다면, 이채연의 민화는 그 전통을 잘 해석했고, 또한 동시대의 요구를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창작할 수 있는 그만의 언어다. 그가 인용하는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는 여전히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도 많은 부분 상통하고 있다. 상처받은 유년의 기억들을 희망으로 바꾸고, 가정의 복을 기원하고, 사회적 변화를 꿈꾸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삶이 위로를 받기를 기원하는, 그의 민화는 전통적으로 기능해 왔던 민화를 동시대를 표현하는 그만의 민화로 재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퀘렌시아’다. 책가도를 재현한 병풍이다. 책가도는 말 그대로 책을 그려 놓은 민화다. 책이 귀했던 시절에 그림으로라도 집에 책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그대로 그려서 벽에 걸어 놓은 그림이었다. 반면, 이채연의 책가도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다양한 물건들을 책꽂이에 올려 놓았다. 각각의 물건들은 작가의 경험과 바램을 상징하고 있는데, 여기에 작가는 자신의 도피와 안식처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퀘렌시아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공간 혹은 그것을 찾는 경향을 의미하는 스페인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다락방을 찾고, 옷장에 숨고, 나무 위에 오두막을 만들어 완벽한 나만의 공간을 찾았듯이 작가의 퀘렌시아는 그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물건들이 만들어준 상징과 의미였다. 또한, 그의 안식처는 병풍이다. 병풍은 지극히 장식적이면서도 그 뒤에 있는 무엇인가를 감출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장례기간 시신을 안장하던 곳이 병풍 뒤였다는 것, 해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나누고 때로 그 경계를 이어주는 것이 병풍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그의 안식처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라는 의미가 없어지고, 지옥과 천당이라는 구분이 필요 없는 어딘가 모를 또 다른 유토피아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소소한 일상의 물건들이 책가도에서는 규칙적으로 정리되기도 하지만 가끔, 전혀 다른 의미로 구성된다. ‘살림 여왕의 트로피’는 그 정물(살림살이)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다. 물론, 그 정물 역시 가족을 위해 살림을 하다가 발견되는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과 같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 트로피를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소한 일상의 정물들에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그것들이 세상에 전하고 싶은 위로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민화다.

 

이채연 작가는 단 한번도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엄마라면 당연하겠지만, 현 사회의 사건 사고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기에 그에게 엄마로서 돌봄의 행위는 상당히 지극한 것 같다. 그 돌봄을 위한 행위에서 많은 부분, 작업의 주제들이 만들어 진다. 많은 작가들은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어떤 이상향에 대한 고민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일상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이야기 역시 중요한 그림의 소재나 주제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채연 작가는 후자의 경향이 강하다. 그의 엄마로부터 현재, 본인이 엄마가 되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경험과 기억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변하고 상징하고 있는 물건들, 혹은 바램과 기복이 담긴 민화적 풍경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소소하지만 명확하게 분석하고, 재해석하고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민화는 동시대를 기록하고 살짝 비트는 일종의 그림일기다. 딱딱한 언론 매체들을 다루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과연 엄마는 희생일까, 아니면 행복일까. 엄마라는 의미. 가족과 그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오는 개인적인 고통. 외로움을 감내하고 개인의 자유를 찾는 것. 그 어느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자신이 세상에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언어가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 행위를 통해 삶의 고달픔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화려하게 장식된 도자기에 아름다운 모란이나 매화꽃이 아니라 거의 매일 끼니 때마다 다듬었을 파를 꽂았다. 그의 푸르게 싱싱한 파는, 세상을 위트 있게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이면서, 한편으로 삶이란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에도 매년 꽃은 피고 진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이 별이 되어 스스로 빛나기를 바란다. 그 마음처럼, 산 속의 꽃은 핀다. 그 깊은 산속의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지켜야 하는 꽃의 의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것. 그 자체, 꽃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글. 임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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